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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로그

다산 초당

  • 작성일 2010-01-06 오후 4:47:00


    

 

국토의 끝, 전라 남도 강진은 남도 문화의 일번지이다. 월출산 아래 멀리 다도해를 바라보며 남단으로 자리 잡은 강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서러운 유배 생활을 하곤 했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이나 유배됐던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수많은 명저(名著)를 저술했기에 강진은 정약전·약종·양용 형제의 고향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인 마재 못지 않은 중요한 사적지로 손꼽힌다.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한 다산은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천주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이미 17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서적을 접하면서 그 오묘한 진리에 매료되기 시작한 그는 1783년에는 형 약전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배 안에서 이벽(李壁)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을 벌이고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취한다.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이 죽음을 당하고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배교의 뜻을 명백히 한다. 더군다나 1797년 그는 다시금 자신이 서학도(西學徒)로 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疎)까지 올려가며 신앙을 부인했고 1799년에는 척사 방략(斥邪方略)을 저술해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천주교를 철저히 부인하고 권철신, 황사영 등 자신이 알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한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의 '여유당'이라는 자호(自號)로써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던 다산. 그러나 어쩌면 그런 머뭇거림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도해를 바라보며 적적하게 선강진의 외딴 초당에서 다산은 "목민 심서", "경세 유표", "흠흠 신서" 등을 저술한다.

 

산천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을 쓸쓸하게 지내고 난 뒤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온 다산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다. 유배 중이던 1811년 그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2, 3년 뒤로 보인다.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 극기(苦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 복음 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 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만천 유고에는 이벽의 "천주 공경가"와 "성교 요지"와 같은 주옥 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배교한 뒤 말년을 회개와 참회로 참된 진리에 자신을 바친 다산은 죽기 직전 중국인 파치피코 유방제(劉方濟) 신부로부터 병자 성사를 받고 숨을 거둔다.

 

다산의 체취가 고스란히 서려 있는 다산초당은 유배의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초당 입구에는 그의 유적비가 외롭게 서 있고 초당 앞에는 차를 갈았던 돌이 놓여 있기도 하다. 또한 18년 동안 정으로 쪼아 정석(正石)이라는 글을 새겨 놓은 초당 옆의 바위는 그의 뉘우침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말해 준다. 자신에 대한 회환과 뉘우침, 순교한 동료들에 대한 애달픈 심정을 우리는 "만천 유고" 발문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한평생을 살다 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을까. 그래도 죽음은 모면하여 급기야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구나. 30여 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강산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 없건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들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 다 어디로 가 버렸기에 하나도 볼 수 없던 말인가!"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사진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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